2007년 06월 24일
우유를 듬뿍 넣은 홍차
벌써 2년 6개월 전의 일이다. 그러니깐 2005년 1월이었다. 당시 나는 막 21살이 되었고 뭔가를 해야한다는 생각과 6개월 뒤 군입대라는 압박감(?), 그리고 막연한 동경심 등 여러 복잡한 감정들에 휘둘리다가 '네팔'이란 나라로 가게 되었다. 별 기대없이 신청한 봉사프로그램에 선발이 된 것이다. 처음 지망한 곳은 '캄보디아'였지만, 상관없었다. 장소는 어디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봉사정신이 투철하고 박애심이 넘쳤던 것은 아니다. 단지, 복잡한 머리와 그와 정반대로 너무나 무료하고 정체된 생활에서 잠시나마 일탈하고 싶었다. 그러니 장소가 어디든, 누구와 함께든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날아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2개의 나라를 경유해서 이틀만에 도착한 곳이 '산의 고향'이라 불리는 '네팔'이었다. 어릴적 책에서만 보고 TV를 통해 접했던 히말라야 산자락에 두발을 디뎠다. 매캐한 공기가 코와 목을 따갑게 자극했다. 앞으로 2주간 머물게 될 나라였다.
내가 '네팔'에 다녀왔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반은 "네팔? 어디있는 나란데?"라는 사람과 나머지 절반은 "히말라야!"라는 감탄사를 토헤낸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네팔'이라하면 히말라야를 떠올린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히말라야의 설산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우유가 듬뿍 들어간 홍차, 밀크티'다. 카투만두에 머무는 내내 아침식사로 'ABF'라는 것을 먹었다. 'American Breakfast'의 약자라는데 네팔로 관광을 오는 많은 서양인들을 위해 마련한 메뉴인듯했다. 덕분에 매일 아침 밀크티를 맛볼 수 있었지만...ABF에는 감자와 바나나, 계란프라이, 토스트 2조각 그리고 밀크티가 나왔다. 그때 마셨던 밀크티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부드러우면서 달달한 맛에 홍차라는 느낌이 들지않고 하여튼 미묘한 맛과 향이었다. 이 밀크티때문에 매일 저녁 한국식당에서 먹었던 우리나라의 하얀 쌀밥보다 다음 날의 아침식사가 더 기다려지곤 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위한 전초기지로 대부분의 관광객이 거쳐가는 포카라에서였다. 4일간의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카투만두로 이동하기 전날 밤. 포카라의 카페에서 다들 자신이 원하는 메뉴를 하나씩 주문했다. 물론 나는 밀크티. 헬레나에서의 아침식사때는 단 한잔의 밀크티로 만족해야 했는데 이게 웬걸. 밀크티가 한잔이 아니라 주전자(?) 채로 나온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홀짝홀짝 한잔을 마시고 또 다시 한잔을 홀짝홀짝. 꽤 여러잔 마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많은 양의 밀크티보다 가장 반가웠던 밀크티는 따로 있다. 푼힐에서의 일출을 보기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을 올랐다. 발목이 넘는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었고 바람은 매섭고 추웠다. 도중에는 정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것같은 많은 별들도 보았다. 그렇게 오르길 한참. 드디어 푼힐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 해가 떠오르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너무 일찍 올라왔다. 수딥, 다다요시, 마쓰미 형과 4명이서 서로 끌어안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정상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아직 주위는 어두운데 누군가 산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처럼 일출을 보기 위해 올라오는 사람들이려니 했다. 그런데 정작 정상에 올라온 그들은 여행객이 아닌 바람이 매서운 정상에서 여행객들에게 따뜻한 차를 팔려는 장사치들이었다. 한참을 추위에 떨었던 터라 따뜻한 차 한잔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 때 푼힐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전에 추위에 떨면서 마신 밀크티 한잔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밀크티였다.
포카라에서의 일정을 끝으로 카투만두를 통해서 귀국길에 올랐다. 히말라야의 설산과 카투만두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밀크티의 맛을 머리속에 간직한채...

그렇게 3주만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매서운 겨울이 가고 3월이 되어 다시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난 6월에 입대를 핑계로 휴학하고 무료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고3이란 틀을 막 벗어나 새내기란 이름으로 한껏 대학생활에 들뜬 학생들로 가득했다. 어쩌다보니 휴학생인 나도 몇몇 후배들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선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학생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선배라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곤 했다. 지금이야 그때의 후배들과 가까워졌지만 당시엔 정말 선배라는 이름앞에 내 얇은 지갑을 열어야 했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후배에게 점심을 사주기 위해 식당을 고르던 중 후배의 선택으로 인도음식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도라...네팔의 문화나 음식이 인도와 매우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네팔에 머물때 들었던터라 괜히 메뉴판을 유심히 봤다. 혹시 '달밧'이나 '난'이란 글씨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뭐 결국 내가 선택한 음식은 카레였다. 카레의 맛은 그저 그랬다. 실제 인도인 요리사가 조리한다고 해서 너무 기대했나보다. 자, 이제 식사가 끝났으니 디저트를 먹을 차례다. 음료가 좋겠지. 메뉴판을 다시 뒤적인다. 그때 내눈에 들어오는 메뉴가 있었으니 '밀크티' 이거다. 난 밀크티, 후배에겐 '라씨'를 권해주었다. 네팔에서의 짧은 생활덕분에 후배앞에서 좀 아는 척하며 '라씨'를 추천해 주었다. 폼 좀 잡았다. 네팔에서의 맛과 같을까.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밀크티가 나오길 기다렸다. 드디어 한 모금 입에 넣어 삼킨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맛이었다. 무심코 들어왔다가 의외의 성과를 올렸다. 기분 좋았다.
그 후로 밀크티를 맛보지 못했던 것같다. 카페에 가도 홍차는 있지만 메뉴에 밀크티는 없다. 네팔에서의 아침을 깨우던 그 향과 맛을 다시 맛보고 싶은데...
# by | 2007/06/24 20:14 | 기록1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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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티하면 영국만 떠올렸는데,. 우유 듬뿍이라는 수식어가 참 좋네요.
카레향 나는 삶은 감자를 난에 싸서 튀긴 사모사도 참 맛있답니다 :)
세상에서 우리에게 지어준 이름앞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죠ㅎㅎ
밀크티의 감칠맛은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네팔에서의 밀크티라니 정말 의외의 궁합이지만 굉장히 멋지네요.